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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fb2021.06.15 13:49
현미(가수)
최근 수정 시각: 2021-05-30 02:58:04


분류 한국 여가수/ㅎ트로트 가수강동군 출신 인물1937년 출생1962년 데뷔덕성여자대학교 출신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의 교회 신자실향민
현미
玄美
가수현미
본명
김명선 (金明善)
출생
1937년 1월 28일[1] (84세)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2][3]
국적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학력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과 / 명예학사)
혈액형
O형[4]
가족
배우자 이봉조[5](사실혼), 슬하 2남
조카
노사연, 한상진[6]
종교
개신교(그리스도의 교회)
데뷔
1957년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

1. 개요
2. 생애 및 가수 활동
3. 결혼 생활
4. 여담

1. 개요[편집]
재즈풍 목소리로 한국형 팝을 선도했던 인물로, 1962년 <밤안개>[7]로 데뷔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90년대 이후 음악보다는 예능 위주로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젊은 세대들에겐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음악계에서는 이미자, 패티 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평가를 받는 대가수이다.
2. 생애 및 가수 활동[편집]
8남매 중 셋째로 1.4 후퇴 때 부모, 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평양의 집이 망가져 조부모댁에 두 여동생이 맡겨졌고 1.4 후퇴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북에 남았다. 종전 직후 두 여동생은 조부모 슬하에서 컸다고.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될 때 친오빠와 동행해서 중국 연변에서 한번 만났는데,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현미가 가수로 데뷔하게 된 동기는 이렇다. 1957년 미8군 위문 공연 무대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1957년 미8군 SHOW 무대에서도 활동하였다. 당시는 드물게 있었던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했고 그 중에서도 센터를 담당했다. 그 때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는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으로 음반을 만들어줬고 현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상 데뷔곡인 셈. 당시 곡을 녹음하던 현미의 성량이 너무 커 다른 가수들과는 다르게 몇 발자국 떨어져서 곡을 녹음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1962년 이봉조와 1집을 작업하며 미국의 대가수 냇 킹 콜의 곡에 현미 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를 발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사실 본래 '밤안개'가 타이틀곡이 아니었으나 '밤안개'가 타이틀 곡이었던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보다 인기가 많아지자 뒤늦게 교체하여 재발매했다. 후속곡으로 '무작정 좋았어요' 활동하며 62년 해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후 60년대 대표적인 여가수로 자리매김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잠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후 '보고 싶은 얼굴'이란 곡을 발표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표현한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 밖에 영화 '떠날 때는 말 없이'와 동명의 곡을 발표해 히트 쳤다. 그 밖에 '몽땅 내 사랑' '애인' '두 사람' 등을 히트 쳤다. 당시 주로 이봉조가 만든 노래만 불렀던 현미는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중에서도 이봉조가 해외 국제가요제 출전에 집중하던 때에 그리스 국제 가요제에 현미와 함께 출전해 '별'로 주요부문에 수상하며 국내외 중저음의 허스키한, 강한 성량의 보컬 능력도 인정 받았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에 힘 입어 미국 레이건 대통령 취임 파티에 초청받아 한국 대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봉조와의 별거 이후에도 가수생활을 꾸준히 하며 인기를 유지 했는데 이 시기에 사실상 이봉조의 유작인 '왜 사느냐고 묻거든'과 2001년 '아내'를 발표하며 히트시켜 현미 독자적으로 가수로서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재즈풍의 보컬로 한국가요, 팝을 불러 히트쳤다면 90년대 이후부터는 성인가요 트로트로 전향한것으로 보인다.

2007년 데뷔 50주년 앨범을 발매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고 한국 최초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지금도 꾸준히 활동중이며 최근에는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주로 외부행사 및 예능 위주로 출현하고 있다. 2020년, 영앤리치 레코즈의 트로트 레슨을 맡게 되었다.

현미 가요무대 스페셜
3. 결혼 생활[편집]

작곡가 이봉조와의 연인관계로 유명했으나, 어느 시기 이후에 이 둘의 관계가 파경을 맞으면서 사실혼이었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현미 측은 이봉조와의 만날 당시부터 이봉조에게 자녀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으나, 임신 후 결혼까지 약속한 이후에 본처가 찾아와서 알았다고 한다. 이봉조는 이혼서류까지 보여주며 현미를 안심시키고 살림을 차렸으나 이후에 본처와의 자녀와 자신과의 자녀들의 나이차이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관계를 정리하자고 요구했다고한다. 그러자 이봉조가 같이 죽자며 칼을 들고 쫓아왔다고 한다. 분위기를 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엄앵란 집으로 피하자 그 곳까지 쫓아왔는데 이 과정에서 신성일과의 물리적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현미가 관계를 정리하고 본처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몇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봉조의 사망 직전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현미가 찾아왔는데 이가 다 빠지고 상당히 심각한 상태임에도 본처와의 재결합을 거부하고, 틀니를 낀 상태로 섹소폰을 부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고 한다. 그 결과 다시 재결합을 약속했는데 재결합 직전에 돌연사로 사망했다고 한다. 생전에 이봉조는 본처와의 합장을 원하지 않았으나, 본처 자식들의 요구와 현미측의 배려로 합장했다고 한다.
4. 여담[편집]
노사봉, 노사연, 배우 한상진의 이모이다. 1980년대 후반에 '사랑은 유리같은 것'으로 유명한 인기 가수였던 원준희는 현미의 둘째 며느리. 어르신도 이런 어르신이 없다. 더군다나 현미는 나이[8]는 말할 것도 없고 연예인으로서도 최불암보다 선배다.[9] 한국 가요계 레전드 패티김보다도 언니이자 선배이다. 패티 김을 '혜자'(패티 김의 본명)라고 대놓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가수가 현미라고 한다.[10] 21세기가 된 후, 그녀가 연예계에서 언니라고 불러 본 사람은 엄앵란 밖에 없다.[11]
작곡가 길옥윤의 작곡 데뷔곡도 사실상 현미 1집에서 이뤄졌다. 길옥윤이 작곡한 곡을 이봉조가 건내받아 현미 1집에 수록했는데 그 곡이 '내 사랑아'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길옥윤 이별 콘서트에 현미가 첫 무대를 장식했다.
예명 때문에 현미 홍보대사가 되기도 했다. 현미가 출연한 어느 방송 중 쌀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는데, 도중에 현미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데뷔할 때는 현미라는 쌀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에 현미라는 쌀이 나와서 자신도 놀라면서도 웃겼다고 한다. [12]
2011년에 슈퍼스타K2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바가 있는데 현미보다 한참이나 어린 옥주현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건 PD의 편집으로 인한 피해일 뿐이다. 노편집 영상을 보면 옥주현은 자기 발언을 할 때 항상 먼저 현미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실 옥주현도 한 명의 전문가 자격으로 심사위원석에 앉은 것이니 현미와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는 거고, 예의바르게 때로는 심사위원답게 이야기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걸 앞 뒤를 잘라버려 옥주현이 현미의 말을 자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슈퍼스타K2 심사위원 중에 짬으로 최고 수준인 이승철은 물론이고 그 이승철이 깍듯이 형님으로 모시는 조용필이 와도 90도 인사를 해야 할 수준의 어마어마한 대선배가 [13] 현미다. 둘의 나이 차는 40살이 넘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옥주현이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게 너무도 자명하다.
2014년 12월 19일 건강보험공단이 공개한 상습 고액체납자 명단에 올랐다. #. 사람들을 잘 믿어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하며 2015년엔 빚이 7억 정도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집에 도둑이 드는 등 악재가 겹쳐 경제상황이 힘들어지자 난생 처음 고속버스를 타고 행사를 뛰기도 하며, 조카인 매니저가 투잡을 뛰는 바람에 운전면허 취득에 도전하기도 했다.
젊었던 전성기 대스타 때 나름 도도하거나 일면 표독스러운 측면을 보인 일화들이 많은 이미자, 패티 김과 달리 천성이 부드러운 측면이 많고 정이 많아서 본인이 잘 나갈때도 후배들에게 따뜻한 선배이자,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도움도 잘 주는 선배였다고 한다. 중년 이후에도 젊은 후배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교류하는데 무리가 없었고, 노년이 된 후에도 어머니같은 선배로 중견 가수나 연예인 후배들에게 인식되었다. 단, 그런 성향이 약간 호구로 작용한 측면이 많았던지 상술된 21세기에 사기당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80~90년대에도 지인들을 도와주다가 돈을 못 돌려받는 등 금전피해를 당한 적이 많아서, 당시 아침 방송이나 토크쇼 계열 방송에 나와 그런 이야기들을 한 적이 많이 있었다.
딩고 프리스타일에서 힙합 레이블 Yng & Rich Records와 함께 한 컨텐츠 '영리한 문제아들'에서 멤버들이 '트로트랩'이라는 곡 작업을 위해 트로트 레슨 선생님으로 특별 출연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멤버들에게 "술, 담, 마약 그런 것만 안하면 된다" 라는 말을 하였지만, 언에듀케이티드 키드가 트로트 곡 가사가 기억이 나지 않자, 본인의 곡인 '돈벌러가야대'를 뽕끼있게 불렀는데, 하필 가사 중 한 줄이 "마약을 하나 더 사야 돼"였다.[14]
CNN의 취재에 따르면, 정부와 협업하는 VR전문 회사 Tekton Space의 도움으로, 가상현실로나마 어릴 적 살던 고향을 체험하는 기회를 받았다고 한다. 6.25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현미로서는 감회가 새로운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분 45초
[1] 프로필 상으로 1938년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2020년 6월 29일 방송된 '스타다큐 마이웨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84세임을 밝혔다.
[2] 어린 시절은 평양시 경림동에서 보냈다.
[3] #
[4] #
[5] 이봉조는 현미와 결혼한 사실이 없다. 현미는 이봉조의 본처 입장에서 상간녀였으며 이봉조 역시 현미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을 본인의 호적에 입적시킨 적도 없다.
[6] 형제는 8남매 중 셋째로 노사연은 언니의 딸이고, 한상진은 일곱째 여동생의 아들이다.
[7] 번안곡으로 원곡은 냇 킹 콜의 It's a lonesome old town이다.
[8] 현미 1937년 생, 최불암 1940년 생이다.
[9] 현미는 1957년에 데뷔했고, 최불암은 1967년에 데뷔했다.
[10] 과거 아침 방송에서 젊었을 때 미군부대 공연하던 것을 회상하는 얘기를 하며 '그때 여러명 같이 있었는데, 혜자도 있었어. 김혜자.'라고 얘기를 했고, 진행자가 배우 김혜자로 오해하자 패티김이라고 설명했었다.
[11] 그녀가 방송에서 직접 한 발언으로,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고, 그녀와 사적으로 친한 연예인 중에 정말 엄앵란 밖에 없다고 했다.
[12] 정말 없던 것은 아니었고, 시중에 판매하지 않았다. 장확하게는 요즘 현미로 보는 7분도, 8분도 도정한 쌀은 당시에 현미로 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 현미라는 명칭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다. 쌀은 8,9 분도 도정한 백미 / 칠분도미 이하 두어 가지로 도정 상태에 따라 나누어 팔았다.
[13] 현미가 60년대에 신인스타이던 남진이 처음 찾아와 인사하고, 어느 정도 친해진 뒤부터 "미스타 남"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남진은 실제 남씨가 아니지만 예명이 그러하니 재미로 부른 건으로 보인다.
[14] 수퍼비가 빌드업 돈벌러가야대를 불러 보라며 빌드업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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